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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감정의 지도 그리기 : 나만의 정서 기록법

📑 목차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방식으로 남는다.
    그 잔향은 도시의 공기 속에, 사람의 발걸음 속에, 그리고 누군가의 일기장 한 구석에 스며 있다.
    ‘도시의 미세감정지도’ 시리즈의 스물아홉 번째 글인 이번 편은

    개인의 감정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기록되고, 그 기록이 어떻게 예술의 형태로 변모하는지를 탐구한다.
    감정의 지도란 결국, 자신이 세상을 바라본 흔적이며, 그 지도 위에는 우리가 지나온 마음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감정의 지도 그리기 : 나만의 정서 기록법

     

    감정을 기록한다는 것은 감정이 머물렀던 장소를 예술로 남기는 일이다.
    ‘도시의 미세감정지도’ 시리즈에서 개인의 정서를 시각화하는 예술적 기록법을 다룬다.

     


    Ⅰ. 감정의 지도, 도시 위에 그려지다

    도시를 걷는 일은 사실상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걷는 일이다.
    우리는 빌딩 숲 사이로 지나가면서도 늘 보이지 않는 감정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그 그림자는 길의 형태와 사람의 체온, 공기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길이를 바꾼다.
    감정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 그림자를 붙잡는 일이며, 흩어지는 마음을 한 장의 풍경으로 옮겨 놓는 창작 행위다.

    서울 종로의 한 작가는 매일 자신의 동선을 하나의 선으로 표시하며 그날의 감정 온도를 색으로 덧칠했다.
    그녀는 불안했던 날에는 잿빛을, 마음이 고요했던 날에는 희미한 청록을, 충만한 날에는 붉은빛을 사용했다.
    그렇게 일 년을 기록하자 한 장의 지도가 완성되었고, 그 지도는 도시의 형태라기보다 오히려 한 인간의 감정 구조를 닮아 있었다.
    그녀에게 지도란 길을 찾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되짚기 위한 사적인 기호였다.

    감정의 지도는 결국 도시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이자, 세상을 감정의 언어로 번역한 시각적 자서전이다.


    Ⅱ. 감정은 언제나 공간과 함께 기억된다

    감정은 공기 속에서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장소의 냄새, 빛의 방향, 벽의 질감, 소리의 높낮이와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조차도 특정한 공간의 온도와 색으로 기억한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Atmospheres』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간은 빛, 냄새, 온도, 질감, 소리, 그리고 여백으로 사람의 감정을 흔든다.”

     

    그의 말처럼 감정은 언제나 감각의 합성체로 기억된다.
    파리의 마레 거리에서 풍기는 구운 빵 냄새와 벽돌 사이의 빛은 그곳을 ‘고요한 사색의 거리’로 각인시키고,
    도쿄의 요요기 공원에서 들려오는 바람과 나무의 부딪힘은 도시 속에서도 잠시 자연의 안온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북촌의 골목에서는 오래된 나무문과 담벼락의 그림자,

    그리고 낮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감정으로 소환한다.

    이처럼 감정의 기억은 장소 위에 중첩되어 있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매개이며, 결국 감정의 지도는 곧 ‘기억의 공간지도’가 된다.
    한 개인이 느낀 정서의 궤적은 도시의 풍경 위에 고요히 새겨진다.


    Ⅲ. 감정을 기록하는 예술가들

    예술가들은 언제나 감정의 기록자였다.
    모네는 아침의 안갯속 빛의 흔들림을 붓으로 붙잡았고, 로스코는 색과 침묵을 통해 내면의 울림을 캔버스에 남겼으며,
    에곤 실레는 인간의 불안을 선의 떨림으로 표현했다.
    그들의 작업은 감정의 일기이자, 시간의 기압 변화처럼 세밀한 정서의 기록이었다.

    스페인의 설치미술가 에바 카르본은 ‘공기 속의 기억’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도시의 특정 장소에서 냄새 입자를 채집해 투명한 유리관에 담아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그 냄새를 맡으며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타인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이 겹쳐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녀는 “공기는 기억의 가장 오래된 매개체이며, 냄새는 감정을 현재로 되돌리는 문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감정의 기록이 반드시 문자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감각 자체로 보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Ⅳ. 감정을 기록하는 언어, 그리고 그 형태

    감정을 기록하기 위한 언어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문장으로, 어떤 사람은 색으로, 또 다른 사람은 소리나 온도로 감정을 남긴다.

    영국의 시인 버지니아 울프는 그날의 날씨나 빛의 결을 세밀히 묘사하며 그것을 감정의 지표로 삼았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날씨를 기록한다. 그것은 내 기분의 표면이다.
    햇살이 바닥에 닿는 방향으로 오늘의 감정이 기울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장은 일기의 형태를 취했지만, 그 안에는 감정의 철학이 있었다.
    단어 하나의 질감과 길이가 그날의 정서를 결정한다는 믿음.
    감정의 기록은 바로 그 미세한 선택의 예술이다.

    요즘은 기술이 감정의 기록을 돕는다.
    감정 색상을 자동으로 시각화하는 앱, 일기 속 단어의 정서를 분석해 감정 온도를 측정하는 알고리즘,
    그리고 SNS의 감정 태그 분석까지.
    이 모든 도구들은 감정을 수치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가 아름답게 시각화될 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예술이 된다.
    감정을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 감정의 존재를 증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는 셈이다.


    Ⅴ. 감정의 지도, 실천으로 완성되다

    감정의 지도는 생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열고, 마음을 쓰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서울의 한 예술대학 연구팀은 ‘감정 산책지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에게 “오늘 마음이 머문 장소를 기록하라”는 제안을 던졌고, 사람들은 자신이 걷는 길 위에 감정의 점을 찍었다.
    어떤 이는 출근길의 회색 도로 위에 피로를, 또 다른 이는 점심시간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 평온을,
    그리고 퇴근길의 붉은 신호등 앞에서는 조급함을 기록했다.
    이 점들은 하나의 정서적 패턴을 이루며 지도 위에서 연결되었고, 그 결과 도시는 감정의 색채로 진동하는 거대한 추상화가 되었다.
    그것은 통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그린 도시의 초상화였다.

    그들은 말한다.

    “감정은 도시의 보이지 않는 인프라다.”
    그 말처럼 감정을 기록하는 행위는 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며,
    인간이 감정을 통해 사회와 공간을 재해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Ⅵ. 기록의 미학, 감정의 철학

    감정을 기록한다는 것은 감정을 통제하거나 분석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이며, 그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훈련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은 인간의 영혼을 보호하는 첫 번째 공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감정의 기록은 인간의 내면을 보호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글, 색, 냄새, 온도 - 이 모든 것이 감정의 형태를 보존하는 벽이 된다.

    한 프랑스 사진가는 비 오는 파리의 거리를 찍으며 말했다.

    “도시는 젖은 감정으로 빛난다.”
    그 말은 도시의 풍경이 단순히 시각적 장면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이 스며든 정서적 층위라는 뜻이다.

     

    감정을 기록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공간화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간을 재단하지 않고, 감정의 흐름을 건축적인 구조로 변환한다.
    그 기록들이 쌓이면 도시의 정서적 지형이 생겨난다.


    Ⅶ. 나만의 감정지도, 도시의 기억이 되다

    감정의 지도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메모,
    짧은 문장 하나,
    혹은 스케치북 구석의 작은 색 점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비 오는 날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소리,
    카페 유리잔에 맺힌 수증기,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
    그 모든 것이 감정의 좌표가 된다.
    이 좌표들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정서적 풍경을 만든다.

    감정을 기록한다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느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감정은 기록될 때 형태를 얻고,
    그 형태가 마음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 기록들이 모이면 도시의 감정은 하나의 집단적 언어로 변하고,
    사람과 공간은 감정으로 이어진다.

    결국 감정을 기록하는 사람은
    도시의 감정선을 완성하는 또 다른 작가다.
    그는 자신이 느낀 모든 것을 통해
    도시의 감정 지도를 다시 그려나간다.
    감정의 지도는 도시와 인간이 함께 써 내려가는
    가장 섬세한 예술이며,
    그 위에 남은 점 하나하나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

    • Peter Zumthor, Atmospheres: Architectural Environments, Surrounding Objects, Birkhäuser
    • Gaston Bachelard, 『공간의 시학』, 문예출판사
    • Roland Barthes, Camera Lucida, Hill and Wang
    • Susan Sontag, On Photography, Farrar, Straus and Giroux
    • 장은영, 「감정의 시각화와 도시의 정서 구조」, 도시문화연구, 2023
    • Eva Carbon, Air as Memory, MACBA Exhibition Archive, 2022